Purple Angel Wing Heart SAHARA
[문학/소설]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2020.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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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AM 02:35

《내게 무해한 사람》. 개강하고 정신이 없어서 책을 못 읽었는데, 간만에 이어 읽었다.
 

'나쁘다'라는 말이 이경은 마음에 들었다. 수이 앞에서라면 얼마든지 더 나빠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러고 싶었다. 이경은 수이를 태우고 가장 긴 경로를 따라 스쿠터를 몰았다. 
(17p, 그 여름)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99p, 지나가는 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156p, 모래로 지은 집)
네가 말했지. 나비는 세상 모든 이름 없는 고양이들의 이름이라고. 그냥 길 가는 고양이에게 나비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들이 좋아서 나비라고 했다고. 화를 내면서, 악을 쓰면서 나비야, 나비야, 하진 않잖아, 라고. 
(176p, 모래로 지은 집)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209p, 고백)
웃음기가 걷힌 얼굴, 두려움과 망설임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 열여덟 혜인이 보고 싶었던 얼굴, 알고 싶었던 얼굴로 여자는 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231p, 손길)
랄도. 그녀는 잘 가라는 말이나 안녕이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랄도, 랄도. 그녀는 한자리에 붙박인 채 서서 울고 있었다.
(296p, 아치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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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 좋았다. 그냥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지. 숨이 가쁘게 사랑을 했던 열여덟의 여름부터 서로의 품에서 잠들던 자취방에서의 겨울, 청춘의 한 부분에서 차이를 발견했던 날과 감정의 변천사, 새로운 인연들, 괴로이 지새던 밤. 
이경이 수이의 이름을 부를 때, 수이가 오랫동안 눈물을 흘릴 때, 그때는 꼭 "우리 참 오래 만났다, 그치."라고 말해줄 것만 같았다. 우린 참 오래 만났고, 오래 사랑을 했지. 적어도 그 과정에 거짓은 없었을 테지.
 

 

그 여름

 

 
601, 602 | 밖에서는 싹싹하고 예의 바른 남자가 집에서는 엄마와 여동생을 때릴 수 있다는 사실, 그에게 '감히' 대들 생각을 하지 않는 가족들과 권력관계 속에서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 여성의 약자성을 환기하며 남의 가정사에 간섭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주인공의 어머니가 친척의 눈치에 끝내 직장을 정리하고 아들을 임신하려고 애쓴다는 결말까지 인상 깊었다. 
(그것과 별개로, 광명시의 주공아파트가 배경이길래 기분이 미묘했었다.)
 
지나가는 밤 | 세상에는 이런 자매도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불을 덮어준다는 별것 아닌 행동조차,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을 수 있으니. 
 
모래로 지은 집 | 개인적으로 가장 여운이 깊이 남았던 단편 중 하나. 나비야, 공무야, 모래야, 선미야, 현우야, 은아야. 꼭 한번 불러보고 싶던 이름들이었다. 세 사람의 관계를 동경하는 동시에 연민했다면 마음이 설명이 될까.
왜 어떤 사랑은 이토록 복잡한지. 왜 서로를 사랑하면서 멀어져야만 하는지. 일렁이는 마음이 같지 않아서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것인지. 두 사람만을 위한 라디오를 켰던 모래, 망설이다가 처음으로 모래의 사진을 찍었던 공무, 나비를 보며 웃는 얼굴로 울었던 모래, 사귀는 사람에 대한 모래의 주정을 묵묵히 들어주는 나비와 공무, 공무의 입대 날 홀로 서서 서툴게 배웅을 하던 나비, 나비만 남은 라디오에서 공무에 대한 말을 토해낸 모래, 나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에 담아 보냈던 공무, 모래와의 통화에서 안도감과 불안감을 함께 느끼던 나비, 진급하여 경찰서 옥상에서 본 하늘에 대해 말하던 공무, 모래가 공무의 카메라로 찍었던 경찰서 건물 옥상과 희미한 실루엣, 잠에서 깬 나비를 다정히 바라보며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모래... 공포와 상처와 무정 속에서라고 해도, 사랑임에 틀림없는 모습들은 있었다고. 어떤 사랑은 그러하다고.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더는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건조한 일상을 위태롭게 걸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건 없다지만 그때 서로 나누었던 마음의 조각들은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백 | 커밍아웃을 했을 때 거부당하는 건 때로는 세계가 끝나는 충격에 버금가곤 하니까. 온전히 사랑했고, 신뢰했고, 좋아했던 사람에게 거절당했을 때의 상처는 엄청나니까. 겉으로는 둔감해 보일 정도로 성격이 좋았던 진희는 실은 아주 예민한 감성을 가진 아이였고 미주는, 주나는, 진희의 예민함을 속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주나의 말과 미주의 표정 중 무엇이 진희에게 더 상처였을지 생각하다 보면 별안간 진희에게 말해주고 싶어진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몇 배로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고. 
 
손길 | 혜인의 심정과는 무관하게, 독자인 나는 '여자'가 참 좋았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혜인이 여자를 반기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혜인 역시 '숙모'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테다. 여자는 다정했고 유머러스했고, 젊었다. 미워할 법도 했던 어린 '조카'를 무척이나 아껴 주던 여자였다. 우연한 재회 후에도, 망설임 끝에 애정을 이기지 못하고(그렇지만 결코 무례하지는 않게) 문자를 남기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그래서 결말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아치디에서 | 새로운 곳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 그 감정이 사랑은 아니었으리라 부정했던 당신은, 그렇다면 어째서 오래도록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나요. 사랑이 아니라면, 어쩌면 사랑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였을까. 연애라는 상태로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좀더 깊은 감정을 나누었던 관계였을지도. "안녕", "잘 지내"라는 명료한 인사 대신 랄도의 이름만 불렀던 하민. 언제 어디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이 없이도,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랄도. 그들의 관계를 말로 정의하기란 그래서 어려운 건가 보다. 
그거랑 별개로, 랄도는 아마도 깊은 트라우마와 우울증에 시달렸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한심하게 살던 과거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한심하게라도 '살지' 않으면 정말 우울감에 파묻혀 죽어버렸을 수도 있는 절망 속에서 살았다면. 근데 솔직히 백수 먹여살리느라 허리가 휘는 엄마랑 누나는 뭔 죄냐고. 역시 억지로라도 독립시키는 게 정답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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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좋다 이 책. 정말 오랜만에 소장하고 싶어진 책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문장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고 아름답고 다정하지. 
작품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로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사랑이 너무 좋았다. 뜨겁고, 차갑고, 미지근하고, 예쁘고, 추하고, 알 수 없고, 솔직하고, 조용하고, 요동치고, 잔잔하고, 어지럽고, 순수하고, 계산적이고, 낯설고, 익숙한 그 모든 사랑들을 나는 사랑하게 되니까. 
유명한 책에는 이유가 있는 듯하다. 너무너무 좋아요 작가님...😳
아무튼, 좀더 일찍 봤으면 좋았을걸.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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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