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9 PM 09:33
《단 하나의 문장》 읽고 있다. 구병모 작가님 단편집이다.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던, 다시 스쳐갈 일 없으며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84p,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뭐 알고 지내온 동안 네가 평타 이상 치는 사람이었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말이야. 그건 이 사회가 말하는 평타의 허들이 워낙 낮아서가 아닐까. 너 나름대로 퍽 준수하다고 여겼던 그거, 옵션 아니고 기본인 건 알지?
(154p, 미러리즘)
물론 제가 영어 말해도, 다들 공부 잘하시니 얼추 알아는 들으시는데, 듣던 기자님, 웬만하면 한국어로 말해달래요. 나 그거 왜 그런지 알아. 말 서툴면 내가 조금 더 안타깝게 보이라고, 더구나 백인도 아니고 하니 사람들한테 되도록 안쓰러워 보이라고 그런 거 같아.
(162p, 웨이큰)
언제는 새파랗게 젊은 여성이 농촌 이야기를 썼다고 놀라놓고선, 자기들 필요할 때는 늦깎이라고 하질 않나 골고루 가관이었다.
(228p, 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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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 | 글쎄, 사실 나였어도 P씨를 비판하는 말들을 리트윗했을 거 같다. 나는 피씨충이니까. 묘사되는 부분이 어느 지점인지는 알 거 같지만, 그래도 개별적인 말들을 보자면 아무튼 내가 동의했을 것들이니까. 그래서 P씨가 맞는 결말이 씁쓸한지도 모르겠다.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 세상 어디에는 여전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마을이 있겠지. 리얼한 심리 묘사에 내가 다 숨이 막혔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 안에서 뭔가가 무너져가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나였으면 진작에 미쳐버렸을 거 같았다.
지속되는 호의 | 제발 사이다 좀요 ㅠ 으악 ㅠ 주인공 살아 있는 부처인 듯
미러리즘 | 성별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는 불이익... 이를 억울해하는 남성(이었던) 주인공의 자기변호와, 그걸 듣는 여자친구의 구도 자체가 흥미롭다. '가졌으면서도 호흡만큼이나 당연한 까닭에 가진 줄도 몰랐던(154p)' 타고난 권력에 대한 이야기. 성폭행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름대로 괜찮은 남자'가 되는 사회는 역시 이상하다.
웨이큰 | 이해하는 거랑 받아들이는 건 다르니까. 기차의 딜레마에서, 한 명이 죽어서 다섯 명이 살 수 있다면 물론 누구나 선로를 그쪽으로 틀겠지. 그럼 그 한 명의 인생은 누가 책임지나요. 선로에 홀로 묶여 있던 그 사람은 달려오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사연 없는 사람 | 나도 명함 만들까.
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 이게 의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읽으면서 종종 웃음이 터졌다. 특히 '곰삭다'의 '곰'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곰국', '곰살궂다', '곰팡이', '곰곰이' '달아 노피곰 도다샤' 등의 표현까지 기피하게 되었다는 부분에서. '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곰을 뒤집으면 문이 된다' 등 다양한 '밈'을 활용하였던 것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사실 은근히 잘 안 읽혔던 거 같다 특히 결말 부분이...ㅜㅜ
오토포이에시스 | 집중력이 바닥에 다다른 상태였어서 좀 꼼꼼히는 못 읽었다. 다만 자신의 여생을 바쳐서 '허무'와 '달관'을 적어내는 AI 백지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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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글이 눈에 잘 안 들어와서 읽는 데 오래 걸렸다. 현학적인 표현이 두드러진 탓도 있었겠으며,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 처음부터 새 이야기가 시작하는 단편집의 흐름을 받아들이기가 생각보다 벅찼던 거 같다. 평소 단편집을 선호하는 편이라, 컨디션에 문제가 있나 고민을 했다. 읽히지가 않아서 초조하고, 초조해서 더 안 읽히는 악순환이었다. 머리가 말랑말랑할 때 다시 읽어보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다소 버거운 책으로 기억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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