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ple Angel Wing Heart SAHARA
[문학/소설]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 조우리
2021.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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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2 PM 10:46


하지만 상미야,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는 일어날 수 있다고 네가 말했잖아. 결국 우리는 영원히 아무것도 완전히 조심하지는 못하면서 살 텐데. 계속 조심하려고 노력만 하면서 살 텐데. 혼자서만 애쓰면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잖아. 어렵고 힘든 일이잖아.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번갈아 핸들을 잡는 게 아닐까. 그것부터가 아닐까.
(29p, 우리가 핸들을 잡을 때)
미경은 그 상자를 들여다보며 그 안 어딘가에 진짜 수아도 들어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만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내는 수아는 가짜이고,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며 눈을 빛내던 진짜 수아는 상자 안의 물건들 사이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89p, 미션)
어디서든, 너도 꼭 너를 지켜. 그게 우리를 지키는 일이 될 거야.
(96p, 미션)
뭐라고 해야 할까. 하마터면 수지와 연애 비슷한 것을 할 뻔했다고, 사랑에 빠진 건 아니고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시도가 있을 뻔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나. 그건 좀 아니지 않나.
(119p,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그건 너무 무거운 질문이라고 지유는 생각했다. '왜'이기도 하고 '무엇'이기도 하고 '누구'이기도 하고 '언제'이기도 하고 '어디서'이기도 한 질문. 모든 물음표가 가득 들어찬 질문. 그래서 오히려 모든 대답을 막아버리는 질문. 지유는 '어떻게'라는 말을 들으면 정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넌 앞으로 어떻게 살 작정이야?
그래서 준희가 그렇게 물었을 때도 지유는 대답할 수 없었다.
(223p, 개 다섯 마리의 밤)

사회에서 소외되는 여러 계층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해시태그로 표현하자면 #여성 #퀴어 #노동 #세대
 
우리가 핸들을 잡을 때 | 첫 작품이었는데 작품 전체의 주제 의식을 요약하는 듯하여 인상적이었다.
동성애자인 딸(주인공), 청소 노동자인 엄마, 엄마의 동료이자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이주해온 금자 씨는 공동으로 운전 학원에 등록한다. 주인공은 운전 문제로 애인과 싸웠고, 엄마와 금자 씨는 운전을 하는 김 어쩌구 씨가 이주 여성인 금자 씨를 무시하는 데에 질려 있었다. 이 메인 설정부터가 사실 상당히 상징적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들이 번갈아 모는 차는 어디를 향할까. 
 
11번 출구 | 나는 다미가 좋았고... 근데 내가 다미였다면? 작품에 등장한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상권 사람들에 대한 어떤 조치도 없이 무작정 물리적인 '선'을 그어 버리는 작중에서의 조치를 또 곱씹어 보게 되는데... 거참 너무하네, 하는 내 감상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사라진다'라는 추상적 메시지를 경제적, 현실적 문제와 엮어서 표현한 게 인상 깊었다.
사장 새끼 때문에 제나 언니와 다미의 관계가 어긋난 게 너무 빡쳤구ㅋㅋ 제나 언니를 찾으려 달려 보아도 경로를 알 수 없었던 다미의 경험이 꼭 사라진 11번 출구를 향해 가는 사람들 같아서 묘했다. 차이점이라 하면, 다미에게는 그 길을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는 거?
 
미션 | 아니 미친 거 아냐????????? 정준석 죽어
'대체할 수 없는 인력'이라는 말을 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그 사람을 물건처럼 여기저기 빌려줘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 않나요. 
수아가 박물관을 그만두게 된 과정과 미경이 상사에게 시달리는 모습이 서로 비슷하여 두 배로 안타까웠고, 그래서 결말 부근의 '너 자신을 지켜'라는 말이 와닿았던 것 같다. 수아가 해준 말을 다시 수아에게 마음속으로 속삭이는 미경의 모습.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 <우리가 핸들을 잡을 때>에서 화자와 상미의 관계가 대수롭지 않게 묘사된 것에 비해, 여기서는 본격적으로 퀴어로서의 여성을 다룬다.
돌잔치, 결혼식 등의 행사에 정윤을 초대하는 모습은 정윤의 친구들이 한국의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편입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윤의 커밍아웃은 우정이라는 명분으로 수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들에겐 이게 '정상성으로부터의 이탈'에 불과하다는 게 참... ㅠㅠ 
근데 주인공이 수지의 말에 뛰쳐나온 장면은 조금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여자라서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하고 보니 여자일 수도 있지 않냐'라는 말은 주인공에게는 레즈비언 당사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모욕적인 말로 들릴 수 있겠지.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인 것도 모르는 헤테로가 말장난처럼 기만하는 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근데 나는 저걸 커밍아웃으로 읽었는걸 ㅠㅠㅋㅋ 아니 너무 범성애자의 정석 멘트 아닌가? 사실 범성애라는 게 수많은 로맨스에서 '어떤 외적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 자체만을 보고 사랑하는', 소위 '찐사랑'으로 포장되어서 가시화가 잘 안 되는 국면이 있긴 한데... 그니까 수지가 한 말도 저런 식으로 자기의 '특별한 마음'을 과시하려는 의도였을 거 같기도 한데... 근데 어쨌든 그것도 사랑 아냐? 여자를 연애 대상으로 고려할 수 있다는 것부터 찐헤테로는 아니라는 거 아닐까?
하... 어렵다. 암튼 그래서 '이게 그렇게 사람을 손절할 만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근데 진짜 어렵다. 내가 놓치고 있는 뭐가 있을지도? 그치만 작품 마지막에 '점이 아니라 하트'를 그려놓은 것만 봐도 수지가 호모포비아는 아니었던 것 같거든ㅜㅜ 물론 주인공이 화가 났던 포인트는 수지가 자신을 사랑하기로 '선택'하려 한다는 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니까 약간 다수와는 다르다는 특별함? 같은 걸 과시하려는 패션퀴어 앞에 선 퀴어의 심정을 그린 걸 수도 있겠는데... 진짜 모르겠음.
 
나사 | 일단 K가 개싫었다. 꼰대새끼야 아니 주인공은 왜 저런 사람한테 돌돌 감겨서...
'나사'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일지 생각하다 보니까 너무 재밌었다. 분명히 의자 다리에서 빠지는 모습을 봤음에도 나중에 확인하니 어디로 굴러갔는지 보이지 않는 나사, 나사의 정확한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는 주인공, 세 가지 서로 다른 나사를 구멍에 끼워 보다가 헐거워진 구멍, 그 나사는 단종되어 더는 팔지 않는다는 철물점 남자의 말. 삐걱거리는 K와 주인공 사이의 관계, K의 집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건 자신뿐이라는 주인공의 독백, 매운탕과 통닭 날개의 상징성 같은 걸 '나사'라는 이 모습과 비교해서 보면 되게 재밌다 진짜.
 
물물교환 | 뇌물... 뇌물인가? 근데 이러시면 진짜 곤란하거든요ㅠㅠ 
 
블랙 제로 | ㅠㅠ사실 이거 결말을 잘 이해를 못 했다. VIP 고객의 심기를 거스르면 해고당하고, '블랙 제로'의 심기를 거스르면 경고도 받지 않는다는 건가.
블랙 제로가 물건을 산다는 '비상 사태'가 발생하면서 '블랙 제로'라는 명칭이 '고객님'으로  변환되던 부분, 여성이 임신을 해도 휴가를 쓸 수 없으니 결국 언제가 되든 해고당하게 된다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개 다섯 마리의 밤미묘한 인간관계가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해고당한 애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과자를 사주겠다면서, 하필 '월급'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건 실수였다. 그러나 사라진 준희를 찾기 위해, 그의 파편에 기대어 버스에 올라타는 지유의 모습은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겠지. 
'개 다섯 마리의 밤'이라는 제목이 특히... 이는 지유가 실제로 버스에서 마주하게 될 밤을 가리키는 동시에, 지유와 준희가 처해 있는 냉혹한 현실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개 다섯 마리의 온기가 있어야만 버틸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추울까. 그 추운 밤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개 다섯 마리의 온기는 또 얼마나 따뜻하고 든든할까.
 
 
반납 기간에 쫓겨 읽다 보면 다소 휙휙 넘어가게 된다. 텍스트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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